K콘텐츠 파워, 실감케 한 러시아 한류 그 현장에 가다
문화는 막힌 길도 에둘러 뚫고 나간다고 하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필자가 느낀 건 전쟁으로 인해 막힌 한국과 러시아의 외교적 국면들 속에서도 한류는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 청년들이 보여주는 한류 열풍 그 현장을 다녀왔다.
러시아인이 사도세자 뒤주 이야기를 하는 진풍경
“여기서 뒤주는 사도사제가 가둬져 죽은 뒤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Agust D)가 낸 ‘대취타’ 중 ‘과건 뒤주에 가두고’라는 가사를 설명하는 한 러시아 대학생이 그렇게 말한다. 한국어를 한국인처럼 말하는 러시아인들도 놀랍지만, 그들이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사도세자’ 같은 한국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건 더더욱 놀랍다. 지난 4-5일 양일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의 풍경이다. 이 행사의 백미는 둘쨋날 마지막 테스트로 치러진 ‘주제발표를 통한 말하기 시험’. 다뤄지는 주제들을 보면 한국의 명절 같은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현재 가부장제를 벗어나 변화하는 한국의 젠더의식, 퓨전화되고 있는 국악, 한복 등등 다양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문화를 소재로 주제를 발표하는 대목에 빠지지 않는 건 한류 콘텐츠들이다. 사도세자 이야기가 나온 건 ‘대취타’의 가사를 설명하면서고, 한국의 젠더의식 변화를 이야기하며 조남주 작가의 소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82년생 김지영’이 등장한다. 퓨전 국악으로서 이날치가 소개되고 한복을 이야기하며 아이브의 ‘해야’ 뮤직비디오가 소재가 된다. 이런 방식은 현재 러시아의 한류가 K콘텐츠의 차원을 넘어 K컬처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행사에 초청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필자에게는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한러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러시아에서는 비우호국이 됐다. 하지만 이 행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청년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실제로 콘텐츠진흥원이 2023년 12월에 내놓은 ‘러시아 특화보고서-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한류 영향’을 보면 2022년 말까지 러시아는 전년 대비 39% 증가한 790만 명의 한류 팬을 보유해 한류 팬 증가율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또 한국어는 2023년 가장 인기 있는 언어 중 하나로 한국어 교재 및 자습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32%가 증가했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고 한 식당에서 참가한 대학생들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러시아의 한국어 교수님들(러시아인들)과 함께 이어진 뒷풀이 자리 역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식을 연구한 러시아인 셰프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운영하는 그 식당에서는 김치전에 잡채 그리고 막걸리가 나왔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익숙하게 한국어로 환담을 나누며 한식을 즐겼다. 그 풍경은 모스크바가 아닌 종로 어디라고 해도 될법한 한국적인 분위기 그대로였다.
막혀 있어 더 뜨거워진 러시아 한류
러시아의 K팝에 대한 인기는 전쟁 이후 유럽 투어에 러시아가 포함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했다. 러시아 팬들이 한국을 방문하거나(K팝 투어가 등장했다) 혹은 인접국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찾아가는 일도 생겼다. K팝 커버댄스 콘테스트가 올해만 해도 3월, 6월, 7월에 열렸고, 지난 7월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러시아의 스트리밍 플랫폼인 MTS가 주최하고 러시아 한국문화원이 후원한 K팝 콘서트에 걸그룹 라잇썸과 송원섭이 무대에 올라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송원섭은 빅토르 최 노래를 커버하며 러시아어권 국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K팝은 물론이고 드라마, 영화 같은 K콘텐츠의 인기를 견인하는 건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러시아 내 스트리밍 서비스는 대부분 제한되고 있다.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보기가 어렵지만 러시아의 스트리밍업체들이 등장해 이를 대체하고 있다. 다른 루트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이들 스트리밍업체들을 통한 K콘텐츠 소비는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다. MTS 같은 현지 스트리밍 플랫폼의 K팝 관련 조회수는 20% 가량 늘었다고 한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는 전쟁 이후 제한된 유럽과 미국 콘텐츠의 자리를 한국 콘텐츠가 채워나가는 형국이다. 공식적인 러시아의 OTT들을 통한 정식 수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SNS를 통한 비공식적인 K콘텐츠의 확산도 적지 않다. 마치 과거 한국에서 있었던 미드 열풍 때 팬들이 자막을 붙여 올렸던 것처럼 지금 현재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식채널을 통해 ‘기황후’, ‘구미호뎐’, ‘마우스’, ‘도깨비’ 같은 예전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면 비공식채널을 통해서는 한국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최근작들(이를 테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같은)도 거의 실시간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국영화의 경우도 최근작들까지 극장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최고 수익을 낸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약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러시아에서는 ‘영화제 영화’로 한국영화가 많이 알려져 왔지만 지난 2022년과 2023년 사이에는 러시아 영화관들이 한국영화를 많이 소개해 보다 대중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 시기 ‘부산행’이나 ‘비상선언’, ‘범죄도시3’ 같은 작품들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어려울수록 문화 교류는 지속되어야
이러한 K콘텐츠의 인기가 한국어나 한식, 패션 등의 K컬처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2020년 모스크바에 문을 연 한국 길거리 음식 체인점 치코(CHICKO)다. 떡볶이, 라면, 김밥, 핫도그 같은 한국 분식을 제공하는 이 음식점은 세르게이 레베데프가 한국의 양념치킨 맛에 반해 창업을 한 곳으로 현재 모스크바 안에만 9개점, 러시아 전역에 40여개의 매장을 가진 대박 프랜차이즈다. 한식을 팔지만 그보다는 한국문화를 판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연일 줄이 이어진 매장에는 한국드라마와 K팝 관련 사진들과 벽면 가득 한국어들로 채워져있다. 그만큼 러시아 안에서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 체인점은 한국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해 한국에서 유행하는 메뉴를 도입하기도 하고, 직원들의 한국방문을 통해 한국문화를 경험하게 한 후 메뉴에 스토리텔링을 더하는 식의 홍보 마케팅도 한다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의 한식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실제로 김이나 커피, 음료, 라면, 소스 등 한국 농식품의 러시아 수출액은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이도훈 주 러시아연방 대사는 “어려운 시국일수록 특히 학술, 문화 교류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필자에게 그 행사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열의가 결국은 “한러 관계의 상호 발전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으로 인해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사뭇 소원해졌지만, 이 현재의 상황이 바뀔 거라 낙관하는 건 바로 미래를 이끌 러시아 청년들의 모습을 통해서라는 이야기다.
현재 러시아 관련 우리네 뉴스들은 대부분 전쟁의 양상에만 집중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딘가 전운이 감도는 모스크바를 상상하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건 완전히 다르다. 특히 한러 관계가 경색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도 더더욱 열기를 띠고 있는 한류는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오히려 실감케 한다. 한러 교류의 민간외교로서 한류가 그 밑거름을 마련하고 있는 한, 향후 상황이 바뀌었을 때 한러 관계의 변화는 한류를 타고 봇물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글:시사저널, 사진:한국국제교류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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