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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선덕여왕'의 출생의 비밀은 왜 식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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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사극의 가능성

'선덕여왕'이 만일 현대극이었다면 어땠을까. 사극이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선덕여왕'에서 우리는 익숙한 코드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출생의 비밀'이다. 이 드라마업계에서는 이미 안정적인 성공 코드로 취급되는 '출생의 비밀'은 이 사극의 전반부를 거의 차지하고 있다. 살기 위해 중국으로 도피했던 덕만(이요원)의 귀환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녀는 먼저 언니인 천명(박예진)을 우연히 만나고, 또 친부모인 마야부인(윤유선)과 진평왕(조민기)을 차례차례 만난다.

게다가 그녀는 중국에서 그녀를 키워주었던 소화(서영희)를 또 한 명의 부모로 두고 있기 때문에, 소화의 등장과 덕만과의 재회는 또 하나의 '출생의 비밀' 코드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사극이 가진 '출생의 비밀' 코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덕만과 함께 버려진 비담(김남길)은 미실(고현정)과의 '출생의 비밀' 코드를 만든다. 미실에게 버려졌으나 돌아온 비담은 또 한 번 버림을 당하는 고통을 맛본다. 이것은 '출생의 비밀'이 부모의 참회로 이어지는 것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이 코드의 변주라고 볼 수 있다.

'출생의 비밀'의 힘은 바로 만남의 시퀀스에서 나온다. 이것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와 가족드라마의 코드다. '선덕여왕'은 인물들 사이사이에 이 만남의 시퀀스를 계속 만들어낸다. 미실과 덕만의 만남, 미실과 소화의 만남, 소화와 칠숙(안길강)의 만남, 덕만과 칠숙의 만남, 소화와 마야부인의 만남, 문노(정호빈)와 미실의 만남, 비담과 소화의 만남, 춘추(유승호)와 덕만의 만남 등등. '선덕여왕'은 이 만남의 시퀀스에서 감정을 강화시키거나 반전을 꾀함으로써 드라마의 힘을 끌어낸다.

멜로드라마의 코드 또한 이제 점점 부상하는 중이다. 덕만과 유신(엄태웅)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이 표면화되고 있고, 그것을 질시하는 비담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이 운명적 관계는 현대극이라면 어색할 수 있었겠지만 사극 속으로 들어오면서 오히려 흥미진진한 멜로를 만들어낸다. 왜 이럴까. 현대극이라면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일련의 코드들은 사극 속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이것은 사극이 가진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멜로드라마가 현대에 이르러 식상하게 된 것은 그 설정이 갖는 비현실성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논리적인 사건이 아니라, 감정적인 흐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드라마다. 그러니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현재의 드라마에서 운명을 운운하는 멜로드라만 특유의 과장은 비현실적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한계는 멜로드라마가 왜 사극이라는 장르와 혼융하여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극 속에서 멜로는 현대극이라면 가질 수 없는 '태생적인 계급'이라는 장애요소를 자연스럽게 선취하게 된다. 즉 서열과 신분이 달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출생의 비밀'을 통해 만들어지는 만남의 시퀀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사극이라는 공간은 현대극이 갖지 못하는 특유의 이야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극이 먼저 그 리얼리티를 바라보게 한다면 사극은 그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바로 이 이야기성은 사극이 왜 타 장르들과 손쉽게 융합이 가능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선덕여왕'은 가족드라마,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플래시백을 활용한 추리 형식의 영상연출, 전형적인 무협 액션 같은 요소들 또한 갖고 있다. 또한 '선덕여왕'의 융합 가능성은  매체 간에도 일어난다. 이 사극은 비담 같은 캐릭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무협지나 만화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도 자연스럽게 엮어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적 매체적 요소들을 끌어안는 '선덕여왕'은 사극만이 갖는 가능성을 증폭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낯설음과 친숙함이 동시에 얽혀있는 공간의 구축이다. 거기에서 누군가는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미드 식의 긴박감 넘치는 시추에이션극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정반대로 아주 익숙한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발견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사극이 갖는 이야기성의 친숙함이 있는 반면, 만화 같은 낯설음과 신선함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사극이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그 사극의 가능성을 100%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