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리부스:행복의 시대

우리는 과연 진짜 행복한걸까.

애플TV+ <플루리부스:행복의 시대>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SF 판타지 블랙코미디다. 

라틴어로 '플루리부스(Pluribus)'는 '다수로 이루어진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은 SNS와 AI로 공유되고 연결된 현 시대의 우리들의 삶을 대변하는 말이다. 

모든 게 연결되어 데이터를 공유하고 그래서 질문을 던지면 언제든 친절하고 공평하게 답을 주는 이 균질화된 세상.

그래서 똑같은 것들을 소비하고 경험하며 그 안에서 행복하다 말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을 말한다. 

그런데 그건 과연 진짜 행복한 삶일까. 

 

<브레이킹 배드> 빈스 길리건 감독과 제작진이 뭉친 이 작품의 상상력은 기발하고 담대하다. 

어느 날 외계로부터 온 어떤 신호에서 비롯되어 모두의 생각들이 공유되는 세상이 도래한다. 

그런데  모두가 변한 세상 속에서 예외적인 존재 캐럴(레아 시혼)은

이 이상한 세상과 대적하게 된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며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캐럴은 그렇게 개인의 경계를 넘어 들어오는 저들이 불쾌하기 짝이 없다.  

플루리부스:행복의 시대

빈스 길리건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적인 유머가 들어 있는 이 작품은

황당한 세상 앞에 경악하는 캐럴의 모습으로 웃음을 주면서도

그 세상이 은유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AI 시대의 풍경이라는 걸 발견하게 만든다. 

마치 나를 아는 듯한 '개인화 서비스'와 

내 생각이 어디서든 데이터화되어 공유되고 활용되고 있는 AI 시대의 '연결'은

현재 우리에게 유토피아적인 행복을 줄것처럼 여겨지지만

이 작품에서 캐럴은 이 세상을 하나의 공포로 체험한다. 

 

행복이 지상과제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에

오히려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과

저들이 전하는 행복이 사실은 고유의 경험에서 나오는 진짜 행복이 아니라

상품 소비의 매커니즘 아래 '동질화된 경험'이 만들어내는 가짜 행복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캐럴이라는 냉소적이지만 냉철한 인물의 코미디를 통해 그려낸다. 

플루리부스:행복의 시대

좋은 작품은 좋은 문제의식에서 나온다고 하던가.

이제 2회만 공개됐지만, 벌써부터 명작의 기운이 솔솔 풍겨나는 작품이다.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이지만,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가 떠오르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정(김지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어디에 갇힌 건지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사람과 고기

어째서 좋은 영화는 극장에서 잘 걸어주지 않을까. 

'사람과 고기'를 보고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집 앞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과 고기'라는 영화는 없다.

결국 불광역 근처 NC 백화점에 있는 영화관까지 발품을 팔아서 영화를 보고 왔다. 

분명히 있는데 상영관에 들어오지 않아 마치 없는 것 같은 영화. 

'사람과 고기'는 그런 취급을 받는 영화와 똑닮은 영화다. 

 

폐지 주우며 근근히 살아가는 형준(박근형)과 우식(장용)은 어느 날 폐지 한 점 때문에 길거리에서 드잡이를 한다. 

그러다 채소가 담긴 좌판까지 침범한 그들에게 화진(예수정)이 따끔한 한 마디를 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가 이어진다. 

또 다른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폐지 줍던 형준과 우식이 마주치고, 

형준은 우식에게 자기 집으로 가서 커피 한 잔 같이 마시자고 권한다. 그 날 미안했다며.

그런데 찾아간 형준의 집이 멀쩡한 단독주택이라는 걸 보고 우식은 놀란다. 왜 형준이 폐지 줍고 다니는지 의아한 것. 

그런 우식에게 형준은 한 마디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집만 있고 수입 없고 자식들은 싸가지가 없어. 됐어?"

커피를 내오려는 형준에게 우식이 묻는다.

"그런데 커피 말고 밥은 없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형준이 아내가 생전에 끓여줬던 소고기 뭇국 이야기를 꺼내고

우식은 그런 그걸 해먹자고 제안한다. 자신이 고기를 가져오겠다며.

그런데 우식은 엉뚱하게도 정육점에서 고기를 훔쳐온다.

소고기 뭇국에 들어갈 야채를 사러 화진을 찾은 형준은

어떻게 그걸 끓이는가를 묻다가 와서 직접 끓여주면 안되냐고 묻는다. 

결국 세 사람은 그렇게 만나 맛있게 소고기 뭇국을 나눠먹는다. 

사람과 고기

하지만 물에 빠진 고기는 진정한 고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꺼낸 우식이

고기를 사주겠다면 찾아간 고깃집에서 '무전취식'을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연쇄 무전취식을 하며 죄책감과 불안감과 더불어 사는 맛을 느끼게 되는 이 노인들의 이야기를 그려간다. 

 

'보니 앤 클라이드'의 독거노인 버전이랄까.

죽을 날이 눈앞에 보이는 노인들은 그것이 범죄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는 맛에 빠져든다. 

'돈 있어야 먹을 수 있고 혼자 먹기엔 서러운 음식'인 고기는 돈도 돈이지만 함께 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이들은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알게된다. 

"살면서 이렇게 가슴 뛰어본 적 있어?"

사람과 고기

영화 속에서 가장 아픈 장면은 형준이 찾아간 친구의 고독사 이야기다.

돈 안들이고 죽는 법으로 영양실조를 선택한 그 친구의 임종을 지키며

"오늘 안 죽으면 기다려야 하나"라고 묻는 형준의 농담에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네"라며 쓸쓸히 웃는 친구의 모습은

이 나라에 노년들에게 존엄은 과연 있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사람이 존엄을 잃으면 한덩이의 고기와 다를 바 뭐가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노년은 마치 없는 시간대의 존재들처럼 치부한다. 

여전히 생산성 중심으로 존재를 인정하는 우리네 사회의 산업화 이후 관성 때문이다. 

하지만 노년들은 존재하고 앞으로는 더더욱 많아질 게다.

복지적 차원이 아니라도 사회를 위해서 이들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큰 재앙이 있을까.

사람과 고기

박근형, 장용, 예수정이라는 대배우들이 이 작은 영화에 기꺼이 출연한 데는 이런 이유가 한 몫을 할 게다. 

배우들 역시 나이 들면 설 역할이 줄어들거나 혹은 전형적인 역할로 고정되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들 대배우들에게 이 작품 속 '보니 앤 클라이드' 같은 독거노인들의 면면은 큰 의미로 다가왔으리라. 

 

작은 영화들 역시 그 존재를 무시당해 왔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이들 독거노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작아도, 아니 어쩌면 작아서 더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볼 수 있는 극장의 풍경이 되길 바란다. 

 

영화 속 엔딩에 들어간

본래 시인이었던 우식의 목소리로 들려준 '청춘'이라는 시가 귀에 쟁쟁하다.  

 

목청껏 웃고 싶어서

목놓아 울어본다

살기도 구찮고 죽기도 구찮다

창공을 잊은 채 주저앉아 그저 펄럭이는 날개짓

가슴속에 할 말이 너무 많아 배고픔도 잊어버린다

호떡 하나 주세요

그 한마디 건네기 겸연쩍어 여적 춥다

시린 가슴 덥혀지게 불이나 질러볼까

눈떠 보니 아침 햇살은 공평하다

 

 

'세계의 주인', 피해자다움의 프레임과 정면대결하는 건강함

세계의 주인

피해자라는 말은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무거운 옷을 입히는 걸까. 

그 프레임에 갇히면 피해자들은 질식할 듯 그 상처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기에 세상은 '피해자다움'마저 요구한다. 그것이 피해자라는 걸 증명이라도 한다는 듯이.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은 이주인(서수빈)이라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한 여고생의 이야기로

바로 그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세계의 폭력과, 이에 맞서는 건강한 생존자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첫 장면부터 학교에서 남자친구와 진한 키스를 나누는 주인의 파격적인 모습으로 영화는 문을 연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 주인에게 벌어진 일들과 그가 현재 해나가는 일들을 목도한 관객들은 극장을 떠나며 알게된다.

그 첫 장면은 에로틱한 장면이 아니라 이 생존자가 온몸으로 자신이 겪은 상처를 뚫고 나가려는 건강한 안간힘이었다는 것을. 

 

친구들 사이에서 인싸로 밝게 살아가며, 어린이집 원장인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고, 학예회에서 마술쇼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귀여운 동생을 챙기는 주인은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여고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출소한 성폭행범의 이사 반대 서명을 해달라는 반 친구의 요구에 의외의 완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주인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난다.

주인은 서명문에 적힌 성폭행 피해자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문구가 틀렸다며 친구에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적은 그 문구를 고치면 서명을 하겠다고 버틴다.

결국 싸움까지 하게 된 그들은 학교측에 의해 화해의 자리를 갖게 되지만  그 자리에서 주인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과거 상처를 꺼내놓는다. "나도 성폭행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인은 물론 과거의 그 상처가 쉽게 씻길 수 없는 것이지만 피해자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또래 아이들과 똑같이 어울리고 연애에도 진심이다. 

하지만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망가뜨린 어린 날의 성폭행 피해는 주인에게도 쉽게 넘기 어려운 상처다. 

주인의 과거를 알게 된 친구들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어떤 친구는 배려한다고 말을 조심하고, 어떤 친구는 너무나 밝게 살아가는 주인의 모습에 그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한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피해자다움'의 프레임에 속에서 주인은 저들에게 함부로 재단된다.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자 주인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달리 보인다.

친구처럼 지내던 엄마(장혜진)는 알코올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안보이던 아빠는 주인을 볼 면목이 없어 도망치듯 산에 칩거해 살아간다. 

그저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처럼 보였던 모임은 알고보니 성폭행 피해자들의 모임이었다.

하다못해 마술쇼에 진심처럼 보였던 동생마저, 마술처럼 누나에게 벌어졌던 일을 사라지게 하고픈 마음을 드러낸다. 

피해자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그저 평범해 보였던 삶이 그 프레임 속에 갇힌다. 

그건 진실이지만 정작 매일 같인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주인이 원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다움'이라는 프레임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2차가해를 당하는 이유가 된다.

법정 싸움을 벌이는 피해자들에게 가해자측 변호사가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비수처럼 이들의 상처난 마음을 난도질한다. 

그런데 도대체 피해자다움이라는 프레임은 왜 생기는 걸까.  

그것은 이른바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의 기대심리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공정하기 때문에 뿌린대로 거둔다는 이 가설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세상의 불안을 줄이기 위한 심리기제다. 

어디선가 갑자기 생긴 어떤 가해나 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게 실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세상이 너무 불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 일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피해자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맞은 데는 맞을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심리기제는 피해사실의 원인을 피해자들에게 전가하는 일이다. 

이를 테면 "왜 그 밤길을 혼자 간 거예요?"라고 피해자에게 묻는 질문에는

그 피해사실이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가 '밤길을 혼자 갔기 때문에' 생겼다는 의미가 담기게 된다. 2차가해는 이렇게 발생한다. 

 

<세계의 주인>은 이 땅의 생존자들에게 함부로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세상과 맞선다. 

주인의 건강함과 그래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 프레임을 깨려 부딪치는 모습은 그래서 주변에도 변화를 만든다. 

저마다 쉬쉬 하며 피해자다움의 프레임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이 주인의 건강함에 힘을 얻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레서 세계의 많은 주인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그래서 자신들을 배제했던 세계에 스스로 주인임을 드러낸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작품은 작은 세계를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관객 스스로 저도 모르게 2차가해의 입장에 서 있다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 상황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래서 폭력적인 세상과 당당하게 대결해가는 주인의 위치에서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너무나 좋았던 명장면들이 많은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세차장 신이 압권이다.

엄마가 모는 자동차에 타고 자동세차장에 들어간 차 속에서 주인은 숨겼던 감정들을 폭발시킨다. 

롱테이크로 찍힌 그 장면은 세차장 바깥의 거품과 솔질, '브레이크를 밟지 마세요' 같은 문구들까지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아무리 겉을 닦아도 안은 변하지 않는 자동차처럼, 주인의 마음이 그러할 거라는 걸 그 장면 하나가 포착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무엇보다 좋은 건, 주인이 감정을 쏟아낼 때 그걸 아무말 없이 가만히 들어주는 엄마의 모습이다. 

피해자라고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마치 생각해주는 척 말 한 마디씩 얹는 게 다반사지만

그것은 어쩌면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이 아닐 게다. 

그보다 그 쏟아내는 그들의 절규를 들어주는 일. 그것이 진정 그들이 원하는 일이 아닐까.

 

국립극단에서 주최한 '명동인문학'에서 스토리텔링 관련 강연을 했다. 

강연장소는 내가 자주 찾는 명동예술극장. 

그 곳에서 이봉련 배우가 출연했던 '햄릿'을 봤고

올해에는 지춘성 배우의 호연에 가슴이 뜨거워졌던 '삼매경'을 봤다. 

그 무대에 내가 오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명동예술극장에서 하는 강연이라는 국립극단측의 이야기에 단박에 하겠다고 나섰다.

 

1시간 일찍 도착해 사전 리허설 때문에 무대에 오르자 

내가 연극을 보곤 했던 객석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간단한 마이크 테스트와 자료화면 점검을 한 후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곳은 연기자들의 분장실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혼자만 앉아 있다가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바라봤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새삼 내가 이렇게 내 얼굴을 오래도록 보고 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나이 먹었네. 희끗희끗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침 그 날 강연 주제가 스토리텔링이어서였는지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다. 

어쩌다 너는 거기 있는 거니. 조금 있으면 저 무대 위에 올라서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해야 하는데...

너는 어쩌다가 먼 길을 돌아서 그 자리에 서게 된 거니?

어려서 자물쇠가 챙겨진 바보상자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던 소년이 떠올랐고

그 후로 서울에 올라와 주말만 되면 극장을 돌아다니던 그 아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대학을 나와 직장에 들어갔지만 IMF로 해고된 후

글쟁이로 전전하다 어느 날 대학동기가 비평 글 하나를 써보라고 한 게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는 그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스쳐지나간 일들에 불과했다.

되돌아보니 그런 파편적인 일들이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작은 스토리를 구성했다. 

아 삶이라는 게 이렇게 스토리로 구성되는 순간 드디어 의미를 갖는구나 싶었다. 

 

스토리텔링 관련 강연을 하러 갔지만

오래도록 거울 앞에 앉아서 나의 스토리를 되짚어본 시간이었다.

스산한 가을 날 조금은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절이 돌아왔다.

바쁜 나날들일 테지만 저마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를 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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