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산지직송’과 ‘크로스’로 돌아온 맏언니의 존재감
요리는 그 사람을 닮는다던가. ‘삼시세끼’ 산촌편에 나왔던 염정아는 특유의 ‘큰손’으로 상다리 부러지는 한 상을 내놓은 것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 면모는 ‘언니네 산지직송’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웃집에서 가져다 준 감자를 단번에 다 삶아서 자신들은 물론이고 촬영 스텝들까지 나눠주는 모습에서부터가 그렇다. 함께 출연한 박준면이 고추장찌개를 하려고 하자 대뜸 대용량 냄비에 하라는 이 맏언니는 요리에 있어 아낌이 없다. 뭐든 푸짐하게 하는 게 습관이 된 듯 한데, 그건 보는 이들마저 군침돌 게 만든다.
특히 ‘언니네 산지직송’에서 염정아의 요리가 어떤 스타일인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건, 이미 연예인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된 식혜를 만드는 장면이다. 남해에서 행복 베이커리를 운영하며 등굣길 아이들에게 공짜로 빵을 나눠주는 ‘빵식이 아재’ 김쌍식의 가게를 찾은 염정아는 자신도 식혜를 만들어 아이들이 함께 먹게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그래서 갑자기 커다란 솥단지에 식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고두밥을 만들어 식힌 후, 엿기름을 면보에 넣고 물 속에서 손으로 하염없이 주물러 효소를 우려내고 그 엿기름물을 미리 당을 넣어 둔 고두밥에 넣어 삭힌다. 그렇게 다섯 시간을 밥통에서 삭힌 후 다시 식혀 끓여 내야 하는 일이다. 아침부터 일터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와서는 특유의 큰손으로 저녁 한 상을 요리해내놓고, 그 와중에 식혜를 만든다고 새벽까지 잠을 설쳐가며 일을 한다. 그 과정은 실로 피곤해보이지만, 그렇게 정성이 가득 들어간 식혜는 작은 페트병에 가득 가득 채워져 아침 등굣길 아이들의 손에 들려진다.
‘언니네 산지직송’을 통해 염정아가 식혜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떻게 미스코리아로 시작해 연기자의 길로 들어와 현재의 톱배우가 되었는가를 가늠하게 된다. 사실 지금은 염정아가 미스코리아 출신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기파 배우로 우뚝 서게 되었지만 그의 연기의 길이 처음부터 꽃길이었던 건 아니었다. 당대의 시선들이 그러했지만 미스코리아로 열린 그의 시작점은 배우라기보다는 연예인의 이미지가 더 강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천국’에 나왔지만 금세 유학 가는 설정으로 하차하게 된 그가 미스 인터내셔널에 참가해 3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그런 심증을 더 갖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염정아는 처음부터 연기자의 길을 꿈꾸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다소 날카롭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염정아는 기회를 만나게 됐다. 바로 김지운 감독의 영화 ‘장화, 홍련’을 통해서였다. 염정아 특유의 날카로운 이미지가 이 작품 속 히스테릭한 계모 역할과 만나면서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영화계는 염정아라는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으로 매혹적인 역할을 연기했고, ‘여선생VS여제자’에서는 코미디를 선보이면서 염정아는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결혼 후 염정아는 꽤 오래 공백기를 거쳤다. 일보다는 육아에 더 집중했고 그래서 배우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들도 나왔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섣부른 오해였다. 드라마 ‘로열패밀리’로 돌아온 염정아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복합적인 욕망을 가진 김인숙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단박에 그 공백을 채워버렸다. 초재벌가에서 갖은 굴욕을 당하며 살아온 전형적인 비련의 며느리처럼 등장하지만, 남편이 죽고 나서 회장과 전면전을 치르는 괴물 같은 캐릭터를 염정아는 마치 제 옷을 입은 듯 연기해냈다. 그 연기는 아마도 공백기 동안 온전히 일보다 육아에 집중하면서 채워진 삶의 경험들이 묻어난 결과로 보인다. 실제로 염정아는 이제 기혼여성의 역할로 보다 원숙해진 연기의 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SKY캐슬’은 그 정점을 보여준 작품이다.
‘SKY캐슬’에서 김주영(김서형)이라는 학생은 물론이고 학부모까지 가스라이팅하는 코디네이터에게 빠져들어 아이를 맡겼다가 그 실체를 알게 되면서 곤경에 처한 한서진이라는 인물을 염정아는 복합적인 연기로 풀어냈다. 어딘가 이상해 김주영을 밀어내다가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릎까지 꿇어가며 다시 그를 코디로 받아들이지만 끝내는 진실을 밝혀 그를 감옥에 보내는 일련의 과정들을 염정아는 무리 없이 납득하게 해줬다. 특히 김서형과 팽팽하게 만들어내는 대결구도는 이 작품을 끝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었다.
‘SKY캐슬’로 정점을 찍은 후 염정아의 연기는 훨씬 여유가 생겼다.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에서는 조우진과 함께 도술을 쓰는 신선 역할로 등장해 코믹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또 류승완 감독의 ‘밀수’에서는 김혜수와 투톱으로 출연해 언니들의 워맨스 액션을 선보였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될 ‘크로스’에서는 황정민과 함께 부부 로맨스액션을 선보인다. ‘크로스’는 전직 블랙요원이었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은퇴해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남편 강무(황정민)와 과거 사격 국가대표 출신으로 강력계 에이스 형사인 아내 미선(염정아)가 모종의 국가적인 사건을 함께 공조해 해결하는 이야기다.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오락영화지만 그 웃음과 카타르시스가 강력하게 느껴지는 작품으로 이를 가능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황정민과 염정아의 현실 부부 같은 케미 덕분이다. 여기서 염정아는 맨몸 액션은 물론이고 사격 선수 출신의 총기 액션 등을 선보이며, 동시에 황정민과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래서 더 진하게 느껴지는 부부애를 그려낸다. ‘언니네 산지직송’에 황정민이 게스트로 출연한 건 그래서 여러모로 ‘크로스’를 함께 한 의리 차원이라고 보이는데, 여기서도 두 사람이 떡벌어지는 한상을 내놓는 요리 공조가 돋보인다.
요리에 있어 큰손으로 유명해졌지만, 염정아가 식혜를 만들 때 보여주는 그 정성을 들여다 보면 이 배우가 가진 시간과 노력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그저 아무 생각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주물러 줘야 해.” 엿기름을 녹이며 그가 툭 던지는 그 말은 지난한 노력의 시간들을 그가 어떻게 버텨냈는가를 드러내는 것만 같다. 고민하기 보다는 그저 계속 해나가는 것. 그것이 요리에서도 연기에서도 큰손인 맏언니 염정아를 만들어냈다. (글:국방일보, 사진:tvN)
'이주의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민시, 쿵 하는 여운으로 남은 강렬함 (0) | 2024.09.02 |
---|---|
혜리, 응원과 가능성의 아이콘 (0) | 2024.08.25 |
이도현, 군백기 무색한 도전의 아이콘 (0) | 2024.08.05 |
장나라, 넘지못할 경계, 한계는 없다 (0) | 2024.07.30 |
이서진, 겉차속따의 인간화 (0) | 2024.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