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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인물

오경화, 늘 응원해주는 든든한 존재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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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와 ‘나의 해리에게’로 주목받는 배우, 오경화

정년이

“암시롱도 않당께. 야 그런 꿈이 있다는 것도 다 네 복이다, 어? 네 마음이 정 그러면 가서 끝까지 한번 부딪혀 봐.”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윤정년(김태리)의 언니 윤정자(오경화)는 그런 말로 동생의 꿈을 응원해준다. 천재 소리꾼이었지만 세상에 상처받고 조용한 삶을 살아온 윤정년의 엄마 서용례(문소리)는 그래서 딸이 소리를 하는 걸 반대한다. 그럼에도 소리가 좋아 무대에 서고 싶다고 하자 서용례는 그 고집을 꺾기 위해 윤정년을 광에 가둬버린다. 먹을 것도 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동생이 걱정된 윤정자는 잘못했다고 빌라 하지만 윤정년의 마음은 확고하다. 지금 자신의 마음을 꺾어버리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것. 1956년 전후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하루 먹을 거리를 찾아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그 시절에 꿈이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동생이 꿈을 갖고 있다는 것에 윤정자는 용기를 낸다. 그 닫힌 문을 열어주고 동생이 꿈을 향해 훨훨 날아가라고 말해준다. 

 

비록 언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없는 재능을 갖고 있고 그래서 무언가를 꿈꾸는 이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응원해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게다. 하지만 이 언니는 동생이 꿈을 향해 나가는 걸 마치 자신의 일처럼 응원한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주는 것처럼. 그래서 그 응원에는 어떤 결과에 대해 자신에게도 돌아올 보상 따위가 덧붙여져 있지 않다. 물론 정년이는 돈 많이 벌어 돌아와 엄마와 언니를 호의호식해주겠다고 말하지만, 윤정자는 이렇게 말한다. “성공 못해도 자꾸 집 생각나고 서러운 생각 들면 돌아와잉? 내가 밤에도 문 안 잠글랑게. 응?” 

 

윤정년과 윤정자의 이 눈물 겨운 장면에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정년이’에 시청자들이 빠져들게되는 지점이 담겨있다. 시청자들은 윤정년을 응원해주는 윤정자의 모습에서 대책없이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건 윤정자의 마음을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고, 그래서 그 마음 그대로 윤정년을 응원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향후 매란국극단에 들어가게 된 윤정년이 마주하게 될 갖가지 난관들과, 그걸 하나하나 뚫고 나가며 성장해가는 과정은, 그걸 알게 된 윤정자가 흐뭇해할 모습 그대로 시청자들을 흡족하게 만드는 과정들이 된다. 전체를 두고 보면 아주 짧은 분량에 불과한 출연이지만, 윤정자의 존재감이 ‘정년이’라는 드라마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윤정자 역할을 연기한 배우 오경화는 주로 이런 역할들을 도맡아 왔다. 주인공의 친구 역할이거나 직장 내 부하직원 같은 주변인물이다. ‘무인도의 디바’에서는 서목하(박은빈)와 정기호의 친구 문영주 역할이었고, ‘하이에나’에서는 정금자(김혜수) 변호사의 비서인 이지은 역할이었다. 그러니 그가 하는 역할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인공을 빛나게 하고 때론 도와주며 응원하는 역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정년이’에서 오경화가 보여주는 연기는 정년이 역할의 김태리만큼 도드라진다. 실제로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시청자들 반응의 대부분은 “오경화가 누구냐”는 놀라움이었다. 약하게 떨리며 슬픔을 꾹꾹 눌러 물기가 가득하고 어딘가 어눌해서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지는 그 목소리로 전하는 대사는 짧은 순간이지만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힘이 느껴졌다. 실로 조역의 힘이 어디에 있는가가 정확히 느껴지는 연기랄까. 

 

이런 연기가 우연이거나 대본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힘 덕분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 건, 같은 시기에 방영됐던 ENA ‘나의 해리에게’에서 주은호(신혜선)의 친구 역할로 미디어N 서울 주차관리소에서 함께 일하는 김민영 역할을 통해서다. 실종된 동생 때문에 경계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 아나운서 주은호는 또다른 인격인 주혜리가 되어 이 주차관리소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것이 동생이 평상시 하고 싶어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동료이자 친구 김민영과의 우정이 시청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결국 고통의 과정을 통해 정체성 장애를 회복하고 돌아온 주은호가 김민영을 찾아와 “너와 있던 시간이... 참 행복했어”라고 말할 때 시청자들도 똑같은 마음이 된 건 그들의 우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대단한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함께 주차관리소에서 수다를 떨고 일상을 보냈던 그들이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던가가 느껴지는 건, 이제 주은호가 김민영에게 이별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해서다. 정체성 장애를 극복하고 주은호가 된 이상 주혜리는 자신에게서도 또 김민영에게서도 떠나보내야 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은호가 자신의 또다른 인격이었던 주혜리를 떠나보내기 위해 마련한 이별파티에서 김민영이 이를 거부하는 모습은 오경화 특유의 꾹꾹 눌러담는 연기를 타고 시청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근데 있잖아. 난 주혜리랑 인사하기 싫어. 난 주혜리랑 이별한 적이 없거든. 이별할 필요도 없고. 친구끼리 이별하는 거 손절인데, 난 주혜리랑 손절한 적이 없어서. 그래서 난 인사를 못해. 혜리야.” 

 

물론 오경화는 2016년 ’걷기왕‘이라는 영화로 데뷔해 아직까지는 대중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되지는 않은 신인배우에 가깝다. 하지만 그간 해온 여러 드라마와 영화 같은 작품들 속에서 이 배우는 자기만의 확실한 색깔들을 채워 넣는 연기를 보여줬다. ’정년이‘에서는 꿈조차 꾸지 못하는 현실에 동생을 응원하는 역할을 연기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오경화는 마치 드라마 속 정년이처럼 연기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하나하나 작품을 해내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 시대에 오경화라는 배우가 더더욱 주목받는 건, 주역만큼 중요해진 조역의 역할을 이제 대중들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면서 이처럼 늘 응원해주는 든든한 존재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에게는 오경화 같은 존재가 있는가. 혹은 당신은 누군가에게 오경화 같은 존재인가. 오경화라는 이 시대의 페르소나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글:국방일보, 사진: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