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슬픈 이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은 세 번 자살을 시도한 대학교수 유정과 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 윤수의 만남을 다룬다. 학생시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당한 유정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분노를 밖이 아닌 안으로 터뜨리는 중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한편 용서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윤수 또한 빨리 사형이 집행되기만을 기다린다. 한쪽은 피해자고 다른 한쪽은 가해자다. 그런데 그 둘은 모두 소통의 창을 닫고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행시는 그런 둘이 만나 닫았던 창을 열고 소통하면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이야기다. 스타일은 휴먼드라마이고 진행은 전형적인 멜로 신파를 따라간다. 관습적인 장면들과 상투적인 사건전개가 대부분이지만 ‘울고 싶어’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100% 이상의 만족을 주는 영화다. 그런데 이 한 영화 속에 여러 층위의 눈물이 있어 주목을 끈다.
첫 번째 눈물 - 멜로
‘우행시’의 설정이 사회극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그저 남녀가 만나는 것이 아니고, 사형수 남자와 자살을 꿈꾸는 여자가 만나는 것이다. 그 어느 한 캐릭터만을 선택해도 하나씩의 사회극이 탄생할 정도의 인물들이다. 그런데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사회극을 포기하고 멜로 라인을 따라간다. 물론 그 멜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 같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사형대에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얘기하는 그 장면들이 이 영화가 멜로와 사회극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을까. 강동원이라는 존재감 있는 배우가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이젠 살고싶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나왔던가. 아니면 사형대에서 “유정씨 내 얼굴 까먹으면 안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던가. 굳이 사형대 시퀀스를 일일이 보여준 것은 ‘사형제에 대한 부당성’ 혹은 ‘인간을 죽이는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고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극적인 멜로를 위한 장치로서 사형대라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불치병이라는 신파 멜로의 틀을 사형대라는 장치로 변용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 클라이막스에서의 눈물은 어딘지 깊은 울림이 없다.
두 번째 눈물 - 관습적 장면들
영화가 멜로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좀더 사회적인 접근을 요하는 장면들은 관습적인 장면들로 채워졌다. 영화가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두 사람간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이지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사회적인 고민이 아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 소개되는 장면들은 너무나 상투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우리는 굳이 그 상세한 전후사정을 몰라도 눈먼 동생을 데리고 추운 거리를 떠도는 어린 윤수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 슬픔을 느낀다. 아니 눈먼 동생의 때에 절은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슬픔은 영화가 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가졌던 슬픔을 영화는 슬쩍 가져온 것뿐이다. 폭력 아버지에 매맞는 엄마로 대변되는 윤수 형제가 처한 상황 역시 관습적이다.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고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 또한 그렇다. 이러한 눈물은 영화 자체의 힘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환기능력, 혹은 이 불합리한 사회가 준 눈물이다. 사회적 문제에서 끌어온 눈물이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대해 어떤 문제제기까지는 하지 못한다. 게다가 ‘가난한 삶이 범죄를 불렀다’는 가난과 범죄의 운명적 도식을 단순화해놓는다.
세 번째 눈물 - 인간에 대한 용서
멜로도 관습적인 장면들도 깊은 울림을 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무언가 다른 눈물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 영화가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장면들을 계속 내보내는 중간, 단 한 시퀀스가 시선을 끈다. 그것은 바로 윤수가 돌발적으로 살해한 파출부의 어머니인 박 할머니(김지영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딸을 살해한 살인범을 고통스러워하면서 용서하는 이 어머니의 장면은 가장 리얼하면서도 독창적이며 영화의 주제에 단숨에 접근하는 힘이 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을 뛰어넘는, 모성애적인 용서는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려했던 것이다.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오마... 제발 살아있어라”라는 박 할머니의 말 한 마디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멜로 신파를 선택했지만 그것이 아쉬운 것은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한 용서’라는 좀더 깊은 감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래 하려던 이야기는 바로 ‘용서’였다. 박 할머니의 이야기는 멜로에 가려진 몇몇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유정이 윤수에게 자신이 학생시절 당했던 이야기를 했을 때, 윤수가 “미안하다” 고 말하는 장면은 용서와 사랑이 남녀관계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다. 박 할머니의 이야기는 좀더 영화 뒤쪽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었다. 영화 중반부에 이미 하려는 이야기를 다한 영화는 이후부터 멜로 라인을 향해 달려간다.
세 종류의 눈물이 말해주는 것
그것이 멜로이든, 관습적 장면이든, 용서든 간에 ‘우행시’는 분명히 사회의 불합리함을 꼬집는다. 결국 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사회가 한 사람에게 어떻게 고통을 주고 그를 죽이는가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윤수를 고통스럽게 했던 아무런 안전망 조차 없는 사회에 대한 질타와 유정을 세 번 자살 시도하게 만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게 사랑이던 종교이던 용서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작은 존재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위로하는 장면들은 슬프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역설적 제목에는 사회의 책임의식에 대한 비판과 체념이 모두 들어 있다. 사회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지만 그들은 그런 사회에 보복하듯이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할 건 그 “행복하다”고 말하는 많은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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