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통해 보는 우리시대 아파트의 실체
최근 삼풍백화점 붕괴를 소재로 한 영화 ‘가을로’의 주연을 맡은 유지태씨의 ‘삼풍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그가 한 말의 골자는 “백화점이 무너진 자리에 고가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며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 자리에 위령탑 하나 없을 수 있나”, 그것이 “한탄스럽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 같은 소재의 영화 주연을 맡은 연기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꼭 자신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로 들렸던 모양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같은 유지태씨의 발언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이 보인 반응이다. 그 중 “그 비싼 땅을 왜 놀리냐”는 댓글에는 유지태씨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을 넘어 분노를 일으킨다. 유지태씨는 “자기도 할말은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로 끝날 수 있었던 유지태씨의 발언이 일으킨 일련의 파장은 좀 비상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유지태씨의 담담한 발언에 대한 반응들이 어딘가 오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혹시 유지태씨와 네티즌, 혹은 아파트 거주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 저 밑바닥에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괴물의 존재가 있는 건 아닐까.
아파트라는 괴물의 힘
그 괴물의 이름은 아파트다. 이명박 전 시장이 28살의 나이에 이사가 되어 앞날을 보고 뛰어들었다는 그 아파트. 평당 몇 천만 원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가치로 팔려나가는 아파트. 그럼에도 분양하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밤잠 안자고 줄을 서는 아파트. 분양권 당첨이 마치 로또 복권 당첨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을 그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아파트.
바로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다. 강풀의 만화를 영화화한 ‘아파트’가 그 촬영장소로 사용됐던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재개발 지역의 플래카드가 토지공사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각각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받았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영화가 현실의 한 부분을 건드리면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며 그 중심에는 모두 아파트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아파트에 어떤 유령이 깃들었길래 이런 논란을 만들었던 것일까.
아파트 아래 묻혀진 피의 기억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는 영화 ‘짝패’와 ‘비열한 거리’ 그리고 ‘아파트’를 분석하는 글(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에서 폭력, 공포 영화 속에 부동산 담론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짝패’와 ‘비열한 거리’에 등장하는 폭력과, ‘아파트’에서의 공포 그 밑바닥에는 아파트라는 욕망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물론 아파트라는 사회적인 괴물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을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거의 동시대에 그 배경으로서 아파트가 등장했다는 것은(그것도 폭력과 공포의 대상으로서), 여러모로 의미를 되새겨볼 만한 문제가 된다.
여기서 폭력과 공포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피의 기억’이 될 것이다. 아파트는 ‘피의 기억’을 갖고 있다. 아파트가 세워지기 위해 누군가는 그 동네를 떠나야했거나 쫓겨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거의 생존을 두고 피를 흘렸던 것이다. 여기서 조폭은 부동산에 대한 환상을 갖고 부동산을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 소유하지 못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짝패’의 필호(이범수 분)는 부동산을 위해 자신의 친구를 죽이고, 와 ‘비열한 거리’의 병두(조인성 분)는 철거로 쫓겨날 처지에 있는 자신이 타지역의 재개발에 앞장선다. 그들은 결국 그렇게 소원하던 아파트 한 채 얻지 못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으로 이 부동산 사업이 끝나지 않는다는 예고다. 그들은 희생되지만 그 뒤에 있는 진짜 부동산 대부들은 살아남는다(짝패의 조사장과 비열한 거리의 황회장). 그러면 그들은 그 후에 어떻게 했을까. 새로운 제2, 제3의 필호와 병두를 기용해 이 돈 되는 아파트 사업을 하지 않았을까.
살아남은 것은 아파트뿐
부동산의 측면에서 볼 때, ‘짝패’와 ‘비열한 거리’가 아파트가 세워지기 전까지의 상황을 그렸다면 ‘아파트’는 그런 피를 기반으로 세워진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아파트의 이미지는 그것이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신분증과 결탁해서 생긴 것이다. 우리가 아파트를 갖는 순간, 그 아파트는 입주자의 신분증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아파트라는 욕망과 그 안의 주인이 되어야할 입주자의 관계는 역전된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 사는 게 아니고, 어디에 있는 몇 평, 시가 몇 억 원짜리의 아파트에 우리가 사는 것이다. 우리가 아파트를 소유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아파트에 종속된다. 아파트를 얻고 길게는 30년 동안 그 아파트의 원금과 이자를 내기 위해 뼈빠지게 일을 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 멀쩡해 보이는 아파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공포라는 장르는 늘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목적으로 탄생한다. 누군가 그 아파트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그 욕망의 분출을 정당화한다. 아파트가 가진 이 두 얼굴(화려한 욕망과 이면의 추악함)에 관객들은 동화되면서 공포로서 자신 속에 있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결국 세진(고소영 분)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세 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게 있다. 바로 아파트라는 괴물이다.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을까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그 상징하는 바가 크다. 강남의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모든 이들의 욕망이 모이는 그 곳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연일 TV에 순식간에 생매장된 사람들의 아비규환을 비추었지만 거기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비평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삼풍이 무너진 것은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반복에 무덤덤해졌다고나 할까.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아파트라는 괴물을 쳐다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처음에는 재개발 문제로 인해 죽은 여러 사람들에 주목하던 것이 차츰 피의 기억을 잊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여전히 아파트가 들어선다. 이러한 무덤덤함, 분노하지 않음이 가져온 결과는 실로 참담하다. 희생은 당연한 것이 되고 이제는 그것이 새로 세워질 건물에 대한 기대감쪽으로 채워진다.
유지태씨와 아파트 거주자, 그리고 네티즌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말들은 그들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징후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아파트에 민감한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우리는 모두 아파트를 소유하려 하지만 그 기저에 있는 것은 이 괴물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곳에 입성하지 못하면 저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없다는 것. 자본주의의 신분증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그 공포심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적극적인 아파트 공화국에의 참여다. 이것은 마치 공포정치가 대중들을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처럼도 읽힌다. 분노해야할 일에 분노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어떤 폭력의 시스템에 침묵하는 꼴이 된다. 침묵은 적극적인 참여의 예고편이다.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영화 ‘가을로’가 우리 가슴속에 침묵하고 있던 피끓는 분노를 끄집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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