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메이드 드라마, <연애시대>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인들의 드라마’라는 타이틀이 걸렸을 때, ‘그래도 드라마라는 특성이 있는데’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연애시대>를 ‘개봉’해보자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TV 앞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서 자꾸만 팝콘과 콜라가 생각나는 건 그것 때문일까.
유치한 악역이 없다
‘드라마(drama)[명사] 1.극(劇). 연극. 2.방송극. 3.각본. 4.‘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네이버 국어사전
뜻 그대로 드라마 속의 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은 극중 캐릭터들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드라마 작가들은 갈등 없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는 쓸모 없는 설명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갈등’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면 마치 선악 같은, ‘마치 적이 있고 우리편이 있어서 서로 싸우는’ 그런 단순한 대결구도를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헐리우드 영화들이 저 숱한 액션영화에서 답습한 결과, 시청자들의 눈을 멀게 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과 악이 분명한 단순한 대결구도는 이제 유치한 설정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드라마들은 여전히 이 쉬운 방식에 사로잡히곤 하는 게 현실이다. 요는 그것이 재미가 있지는 않을 지라도 여전히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연애시대>가 재미있는 건 이러한 유치함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인물 하나하나에 정이 간다
<연애시대>에는 악역이 없다. 인물 하나하나 보면 볼수록 정이 간다. 능구렁이 같지만 자상한 면을 갖고 있는 감우성, 당차고 드센 듯 보이지만 여린 구석을 갖고 있는 손예진, 자신이 가장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지도 모르고 남 걱정만 하는 공형진, 다시 되살아난 김삼순 이하나, 재수 없는 황태자를 위장한 상처 많은 남자 이진욱, 섹시함 뒤에 숨겨진 모성애 오윤아, 늘 앙 다물고 있지만 한번 웃기만 하면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녀의 딸 전지희, 과격한 프로레슬러지만 왠지 정이 가는 손예진의 친구 하재숙, 용서보다는 화를 내라는 엉뚱한 신부 김갑수... 그 누구하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인물이 없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시종일관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은 ‘공감’이다. 그 사랑스런 인물들의 진정성에 대한 이해는 보는 이들을 따뜻하게 또는 안타깝게 만드는 힘이다.
갈등은 밖이 아닌 안에서 생긴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들 간의 갈등은 어떻게 벌어질까. 그 갈등의 원인은 인물들 밖이 아닌 안에 있다. 그들이 화를 내는 건 상대방 때문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을 때이다. 왜 화가 났을까. 상대방의 의도하지 않은 말 몇 마디, 혹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황이 내 속에 있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손예진의 상처는 어린 시절 엄마의 죽음과 최근 사산된 아이이다. 이로서 그녀는 스스로 ‘엄마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녀가 이혼한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손예진을 쫓아다니는 황태자, 이진욱 역시 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오윤아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상처(아이에 대한 것이 더 큰)가 있다. 그래서 엄마 자질이 없다며 스스로 자책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붙들어줄 자상한 아빠를 희구한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의 문제는 엄마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문제의 반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상처가 ‘불쌍한 엄마’때문이며, 그 불쌍한 엄마를 만든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손예진은 엄마가 죽어가는데 기도만 하던 아빠를 이해할 수 없고, 이진욱은 버려져 아빠만을 기다려왔던 엄마를 한번도 찾아와 보지 않은 아빠를 증오한다. 오윤아는 스스로 엄마이기를 포기하게 만든 남편을 미워한다.
헤어져봐야 안다
이 상처 많은 이들은 이제 드라마에서 서로 중첩되면서 서로를 보듬는다. 같은 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는 손예진과 이진욱은 그 기억 앞에서 서로 몸을 기댄다. 오윤아가 남편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감우성은 그녀를 위해 남편에게 ‘애인’이라고 말한다. 이건 연애일까, 동정일까, 혹은 동감일까.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 상에서 헤어져봤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의 대비이다. 즉 엄마 아빠가 됐었던(혹은 됐을 뻔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에는 사랑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진욱의 아빠는 사실 찾으려 해도 아내를 찾아갈 수 없었던 것이고, 아내의 죽음 앞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기도했던 김갑수는 사실 가장 큰 상처를 입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여기서 오윤아는 예외적인 인물인데, 그것은 스스로 헤어지는 걸 원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래서 모두 자식들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진짜 사랑을 보여주려 한다. 반면 이진욱의 손예진에 대한 사랑은 사실은 아빠에 대한 보복심리가 더 크며, 오윤아의 감우성에 대한 사랑은 모성애가 더 강하다. 감우성과 손예진은 그 중간에 서서 갈등하게 된다. 엄마 아빠가 되어 현실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해진 드라마 관계 속에서 자꾸만 발견되는 것은 감우성과 손예진의 사랑이다. 헤어짐(아픔)을 경험했던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사랑 혹은 동감과, 남녀로서의 사랑(연애)을 동시에 다 아우른다. 그들은 아픈 만큼 조금씩 성숙해간다. 마음 속에 남겨진 앙금이 걷히는 과정이 이 드라마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나는’ 이들은 ‘성숙된 남녀’로서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웰메이드 드라마의 전형될 듯
이 드라마는 연기자나 연출, 촬영 어느 모로 보나 웰메이드 드라마의 전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수많은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과 장면들이 사실은 그냥 들어가는 것이 없을 정도로, 꽉 짜진 이 드라마는 보면 볼수록 ‘아 그 때 그랬었지’하는 동감을 이끌어낸다. 드라마 처음부터 등장했던 물 속에 들어가 허우적대던 한 사내(서태화 분)는 전혀 쓸모 없는 인물처럼 느껴졌지만 6회분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한 번의 출연을 위한 충분한 사전포석에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손예진의 상처를 치유해줄 비법을 전수해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매번 출근길에 감우성이 확인하는 손예진의 자전거, 청혼과 이혼 선언을 했던 단골 카페 등등 계속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은 후에 벌어질 어떤 사건 같은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좋은 영화는 함부로 버리는 것이 없다. 이것은 거꾸로 얘기해 슬쩍 들이민 캐릭터도 다 분명한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경제적이라는 뜻도 되지만, 진짜 의미는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드라마들은 시청률과 맞물려 갑작스런 캐릭터의 등장과 퇴진 등의 소모적인 방식을 취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인들이 흔히 하는 말로 “덜컥거린다”는 말이 있다. 이건 드라마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끼워 넣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연애시대>, 이 덜컥거림 없으면서도, 뻥튀기된 근육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쩍 마른 앙상함도 아닌, 숨은 근육들이 잘 균형 잡힌 드라마를 보면서 팝콘이 먹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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