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드라마에 나타난 성향들
요즘 드라마들이 때아닌 가족 열풍에 휩싸이고 있다. <별난 여자 별난 남자>, <하늘이시여>, <소문난 칠공주>, <불량가족>, <연애시대>, <굿바이 솔로> 등 가족의 문제를 다룬 드라마들이 TV시청률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렇게 가족이 화두가 된 것은, 아마도 파편화되고 해체되어가는 가족들이 늘고 있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삶을 버겁고 힘들게 만드는 것도, 또 그 힘든 걸 견디고 이겨내게 만드는 것도 가족이라는 점에서 많은 시청자들은 드라마 세상 속의 가족을 꿈꾼다. 그래서일까. 가족을 다루는 드라마들은 그 시각에 있어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고, 따라서 그 가족들을 보는 시각은 보수든, 중도든, 진보든 정치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 집구석은 어떻게 살아가나, <별女별男>, <소문난 칠공주>
주간시청률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별난 여자, 별난 남자>가 보여주는 가족은 과연 현실적일까. 매일 매일 지친 일상 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엿보며 자신들만의 가족을 꿈꾼다. ‘도대체 저 집구석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채널을 고정시키게 만드는 요인이다. 물론 그 집구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청자들에 따라 다르다. 함께 모여 단란한 저녁식사를 하며 드라마를 시청하는 가족은 아마도 “저 집구석도 우리랑 참 비슷하네”하는 공감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이미 해체된 가족들은 과거의 단란했던 기억들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 땐 툭탁거리면서도 모두 함께 있었는데...”하며 순간 드라마가 주는 달콤한 최면에 빠질 것이다.
최근 시작된 주말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도 이러한 보수적인 중산층의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전통적인 ‘딸 부잣집’이야기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고전적인 연애담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곡절도 많고 사건도 많은 딸 부잣집’은 일단 그 이야기가 풍부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많은 딸을 ‘어떻게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서 결혼시키는가’ 하는 연애담으로 집중된다. 여기서 딸들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면서 가족 간의 드라마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삶은 힘들어도 가족이 있어 좋다구?
이들 드라마는 어찌 보면 바람잘 날 없는 많은 가족 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어, 마치 ‘세대간의 부딪침’으로 그 이야기를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드라마가 다루는 가족이라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전통적인 시각, ‘아무리 힘들어도 역시 가족은 가장 중요하다’는 보수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들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 역시 가족 구성원을 만드는 ‘결혼’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 같은 것들은 가족 바깥의 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가족 안에서도 그 징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드라마들이 요즘 시청률이 좋은 이유는 강력한 환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거기 만들어져있는 여러 군상으로 이루어진 가짜 가족구성원들은 시청자들에게 투망식 감정이입의 그물을 펼쳐든다. 왠만한 사람은 그 드라마 인물들 속에 자신을 투영하게 되고, 그는 30분에서 1시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현실을 잊고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매일 기다려지는 몇 분이 갖는 의미이다. 몇 분간의 환상은 사람들을 현실사회의 모순에 저항하기보다는, 잊고 버티게 하는 태도를 만든다. “삶은 힘들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어 좋다”는 말속에는 삶을 힘들게 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무화시키고 “가족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체념이 숨어 있다. 이것은 그 문제를 제공한 자들이 줄곧 내세우며 참으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아예 한 발 더 나가버린 <하늘이시여>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하늘이시여>에 비교하면 순진하기까지 하다. <하늘이시여>가 갖는 보수성은 가족 논리를 넘어서 혈연, 피의 논리까지 다다른다. 행복을 위해 자신의 친딸과, 재혼해 갖게 된 아들을 결혼시킨다는 이 비상식적인 구도가 대대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그 속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연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과, 그런 어머니들에 의해 그건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진 우리네 자식들은, 이 놀라운 조합의 드라마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왕지사 혈연을 드러낸 바에야, 드라마의 쿨함 같은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다. 우리는 쿨한 가족들의 침묵이 갖는 그 여운을 읽기보다는, 머리끄댕이 잡아당기고, 뺨을 올려부치는 장면 속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을 잡아낸다. 어머니의 과도한 사랑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비정상적 애증을 확인하며 부르르 몸을 떨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길 때, 그 머리는 자경의 머리가 아닌 시청자의 머리였고, 뺨을 맞았을 때, 그 뺨은 한혜숙의 뺨이 아닌 시청자들의 뺨이었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이 성장하면서 가져왔던 애증을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떠올린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무화시키는 혈연과 애증의 틀이다. 도대체 현실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유아적인 분노를 끄집어내서 뭘 하겠다는 건가. 특별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자극적 설정으로 시청자와 애증적 관계를 추구하는 이 드라마는 애초부터 끝없는 연장방영이 예고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평상시에는 바꿔야 한다고 소리치다가도 매번 선거 때만 되면 연장 방영되는 지역 색과 닮아있다.
가족에 대한 불온하지만 참신한 생각들
최근 시작된 <불량가족>과 <연애시대>는 가족에 대한 불온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불량가족>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되듯 우리네 해체된 가족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묶어낸다. 가족이 모이는 것은 돈 때문이며, 유지되는 것 역시 돈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억지로 엮인 가족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은 TV밖의 세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억지로 엮인 가족들도 한 집안에 담기면서 제법 가족 같은 분위기를 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해체된 가족을 보여주면서도, 또 그 가족이라는 패러다임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지면 생겨나는 이기주의와 유사애정 등이 우리에게 끝없이 웃음을 만들어내지만 그 웃음 끝에는 단란한 가족이라는 허구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달려있다.
‘헤어지고 시작된 이상한 연애’라는 카피로 소개된 <연애시대>는 마치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는 것처럼 발랄하면서도 그 깊은 내막 속에 결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진 틈바구니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연애감정을 이혼 후에 느끼게 되는 이 드라마에서는 가족이라는 무게가 빠져버린 중년 남녀들이 출연한다. 그들은 결혼을 했다가 이혼했거나, 이제껏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결혼이 아닌 연애이다. 또다시 결혼이라는 늪으로 빠져들지 않으려 애쓰는 그들은 서로를 미워해 이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결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날 밖에. 그들은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이로써 사랑=결혼이라는 등식은 자연스럽게 깨져버리면서 드라마를 연애담에서 사회극으로 끌어올린다. 능동적인 연애와 수동적인 결혼이라는 양자구도 속에서 이 이야기의 도발은 가족이라는 사회적 구성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결혼과 반드시 하지 말아야할 이혼을 거꾸로 뒤집어보게 만든다는 데 있다.
집밖으로 나온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굿바이 솔로>
<굿바이 솔로>는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해체된 그 후의 세계, 혹은 대안을 다루고 있다. 기존 드라마와는 다르게 7∼8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 드라마는 이미 해체된 가족을 전면에 드러낸 셈이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가족이 해체되어 홀로 살아가는 솔로들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상처를 안고 홀로 살아간다. 그 상처는 다름 아닌 가족의 해체의 원인이기도 하며, 혹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집밖으로 나온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이웃을 만나고 가족보다도 더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해체된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이기에 그 이해는 남다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그러면서 거기에 따스한 온기를 만든다. 그들을 여전히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바로 그 가족이다. 가족의 망령이 그들의 아물려 했던 상처를 뜯어낼 때 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 했던 그들은 울부짖는다. 그러나 그 울부짖음의 옆에는 항상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이 있다. 그들은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으나 홀로 남은 그들에게 위안이 된다. 상처 입은 짐승이 이웃을 찾았을 때 그들이 해주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고(이건 가능하지도 않다) 단지 얘기를 들어주며 안아주는 것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노희경 작가는 말한다.
노희경 작가가 보여주는 이 솔로들의 상처 보듬기는 차라리 아나키즘적이고 히피적인 냄새까지 풍긴다. 그 안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도 없고, 빈부의 격차도 없다. 온통 상처뿐인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러 갔는데 그 사람도 역시 상처를 갖고 있더라”는 식의 드라마 구조는 묘한 감동의 골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격렬한 부딪침 속에, 침묵 속에, 스쳐지나가듯 던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 한 마디에 촌철살인의 감동이 묻어난다. 그들이 가족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비로소 이웃의 존재를 깨닫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듯이, 이 낯선 드라마가 전통적인 가족 중심 드라마의 틀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우리는 드라마가 가진 환상의 틀을 벗어나 가족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카메라 앵글 바깥쪽에서 상처받고, 카메라 앵글 안쪽으로 들어온 솔로들은 이웃들과 만나 ‘솔로’를 ‘굿바이’한다. 카메라 안에서 연실 저 바깥에서 받은 상처를 핥고 보듬는 인물들을 보다보면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상처 입게 했나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사회적인 메시지다.
현실은 멀고 환상은 가깝다
이들 드라마들을 편의상 보수와 혁신의 잣대로 나눈다면, <하늘이시여(극보수)>-<별난 여자 별난 남자, 소문난 칠공주(보수)>-<불량가족(중도보수)>-<연애시대(중도혁신)>-<굿바이 솔로(혁신)>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가족에 대한 시선이 보수로 가까이 갈수록 시청률이 높아지고 혁신으로 갈수록 시청률이 낮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TV에서는 피곤한 하루의 끝에 현실을 보기보다는 강력한 진통제로서의 환상을 요구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청률이 드라마의 질을 답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의 질은 정반대의 순서로 흘러간다. 이 시청률과 드라마 품질의 반비례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왜 좋은 드라마가 좋은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답은 아무래도 TV라는 매체 스스로 사회적 영향력을 낮춤으로써(대신 시청률을 얻었다) 자초한 결과이거나, 가족이라는 품으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답답하고 울화통 터지는 사회에서 그 책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TV 스스로 정치적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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