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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굿바이 솔로>가 <크래쉬>보다 좋은 몇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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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솔로> vs <크래쉬>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다중스토리 구조이다. 하나 혹은 둘의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이 똑같은 가치를 갖고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전체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구조이다. 아마도 우리는 <러브 액추얼리>나 <숏컷> 같은 영화를 통해 그 구조를 친숙하게 느꼈을 것이다. 최근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로, 이제 이 실험적인 구조는 더 이상 실험적이지 않은 하나의 관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주인공들이 많은 걸까
이 구조가 하나의 관습이 되고있는 이유는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드라마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스토리 구조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고리마저 희미해진 현대인들은 각기 하나의 섬처럼 사회 속에 존재하는데 그들의 얇기 만한 관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어느 한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독선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등장하는 <시리아나>, <뮌헨> 등 일련의 영화들이 의도적인 드라마 엮기가 아니라, 인물들 간의 부딪침을 그저 보여주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의도적으로 작가의 손길을 배제함으로써 복잡다단한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크래쉬>와 <굿바이 솔로>가 같은 다중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으며 또 둘 다 현대인들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만, 이 두 스토리는(영화와 드라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제작된 곳의 거리만큼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거리도 멀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크래쉬>
<크래쉬>는 어느 교통사고 현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왜 사고가 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할 즈음, 영화는 하루를 되돌려 그 사고의 이유에 모든 주인공들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집착적’으로 잡아낸다.

요로병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 있는 라이언 경관은 흑인부부 카메론과 크리스틴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두 명의 흑인사내인 피터와 앤소니는 검사의 차를 강탈하고 도망치다 한국인 조진구를 치게 된다. 이란인 파라다는 가게가 털린 것을 열쇠수리공 대니얼의 탓으로 돌리고, 결국 가게를 지키기 위해 사들인 총으로 열쇠수리공 대니얼에게 들이댄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면서 상대방에 대한 과잉방어로 일관한다. 그러다 이야기는 급반전을 하게 되는데 교통사고를 당한 크리스틴을 이번에는 라이언이 구하게 되고, 파라다가 열쇠수리공 대니얼에게 총을 쐈을 때, 그것을 막기 위해(?) 뛰어든 대니얼의 딸(딸은 대니얼의 말을 믿고 자신은 불사신이라 생각했다)을 파라다는 천사로 여기게 된다(본래 그 총의 총알은 공포탄이었다).

이 영화는 911테러 이후, 어떤 사고가 일어난 후 겪는 극도의 스트레스인,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미국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그 부딪침을 사실은 ‘서로에 대한 느낌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충돌하는 것이라고 화해시킨다. 이러한 강박적인 화해는 아마도 작가인 폴 해기스 스스로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억지스런 화해와 관계(LA가 그렇게 좁은 동네인 지 몰랐다! 인물들이 그렇게 극적인 순간에 다 만나게 되다니!)를 받아들이고 이 작품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준 미국은 아마도 똑같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동병상련 속에서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화해의 제스처가 가져올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여지는 라이언이 직권을 남용해 성폭력을 했던 크리스틴을 사고현장에서 구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란인 파라다가 운 좋게도(?) 공포탄을 쏴서 대니얼의 딸을 살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녀를 천사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의 살인미수가 덮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작가의 바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반전은 이미지적으로 관객들에게 이미 해결점을 보여주어 어떤 문제에 대한 논의를 덮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사실은 뒷짐 지고 캐릭터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부딪침을 만들도록 작가는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작가의 강박은 그걸 허용하지 못해 결국 인물들을 인형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이 좋은 소재의 스토리는 하나의 교훈적인 우화가 되고 말았다.

<굿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인간에 대한 신뢰
반면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에는 이야기 흐름에 있어서 작가의 개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인물 속에 자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상처) 철저히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폭력남편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한 딸과의 약속을 저버린 자책감에 말을 하지 않는 미영 할머니(나문희 분), 어린 시절 지긋지긋했던 가난으로 병져 누운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영숙(배종옥 분), 뒤늦게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집을 뛰쳐나온 민호(천정명 분), 복수심으로 민호의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민호의 사정을 알게되고 괴로워하는 지안(이한 분), 장애가 된 한 여인에게 순정을 갖는 깡패 호철(이재룡 분) 등등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애초부터 문제를 갖고 출발한다.

이 인물들이 <크래쉬>에서와 다른 점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알고 있으며 또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피해서 달아난 인물들로 드라마는 시작하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직면하고 이겨낸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아파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지는 않는다. <크래쉬> 등장하는 인물들의 문제를 아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작가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지, 등장인물들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인형처럼 수동적인 반면 <굿바이 솔로>의 인물들은 대담할 정도로 능동적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작품의 방향성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크래쉬>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작가에 의해 주어진’ 한 방향성을 갖고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지만, <굿바이 솔로>에서는 능동적으로 각자의 문제에 부딪친다. 그들은 잃은 만큼 얻어간다. 작가의 작품과의 거리가 이러한 차이를 만든다. 이로써 <굿바이 솔로>는 <크래쉬>가 억지로 얻으려 했으나 얻지 못한, 다중스토리가 그 구조적으로 얻어야할 주제를 얻어낸다. 각자의 군상들이 어떤 아픔을 주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각자 다른 방법으로 해결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카메라 밖에서(사회) 상처를 입고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로 아파서 부둥켜안으면서 상처를 핥아준다. 이것은 치유라기보다는 위안이다. 대신 그 위안 뒤에 작가가 하는 말은 사회(혹은 제도)에 대한 강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강한 신뢰이다.

둘 다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를 보여주지만
다중 스토리가 얘기하는 세계는 수평적이다. 어느 한 인물에 의해 드라마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는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과 그 부딪침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다큐멘터리 같다. 이런 수평적인 얘기를 하는데 있어서 작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관계에 개입하기보다는 사회의 문제를 대변하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된 인물들에게 생명을 넣어 사회라는 다큐멘터리의 세계 속으로 투입한 후 벌어지는 드라마를 관전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의도는 억지로 짜진 스토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드라마가 가진 길이와 영화가 가진 길이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2시간 남짓의 <크래쉬>라는 영화가 인종의 용광로로 상징화시킨 LA라는 거대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반면, 16부작에 걸친 <굿바이 솔로>의 배경은 서울의 어느 작은 한 동네라는 것이다. 보다 포괄적인 사회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거대한 지역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많은 인물들을 억지로 얼기설기 엮는 부작용을 낳을 가망성이 높다. 반대로 축소판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굿바이 솔로>는 깊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위의 비교는 그 이야기가 제공하는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배제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낫고 무엇이 그르다고 하기 어렵다. <크래쉬>가 처한 미국의 현실은 <굿바이 솔로>가 보여주는 우리네 현실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어쩌면 <크래쉬>의 이 억압적이고 강박적인 드라마의 등장(과 그 적극적인 수용)은 미국 사회가 가진 병리적인 상태를 모두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