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전도연, 미친 존재감의 비결 본문

이주의 인물

전도연, 미친 존재감의 비결

D.H.Jung 2024. 6. 24. 19:44
728x90

‘벚꽃동산’으로 27년만에 연극 무대에 선 전도연

벚꽃동산

어떤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서도 빛나는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 있다. 배우 전도연이 그렇다. 최근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 원작을 세계적인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재해석해 내놓은 연극 ‘벚꽃동산’의 무대에 선 전도연은 첫 등장부터 마지막 엔딩까지 미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건 전도연이 자신의 삶을 투영해내 몰입해낸 연기라는 점에서 관객들 또한 빠져들게 만들었다. 어째서 이 배우가 지금껏 영화, 드라마, 연극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하며 대중들을 울리고 웃겼는지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무대 위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은 농노해방이 일어났던 1861년 이후 러시아의 혁명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벚꽃동산이 있는 대저택의 소유주였던 류바가 오랜 타국 생활에서 귀향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결국 농노 출신으로 그 집안에서 컸지만 큰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상인 로파힌에게 벚꽃동산도 또 집도 모두 팔린 채 그 곳을 떠나게 되는 류바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농노해방 시기에 벌어지는 신분 체계의 해체와 이로 인한 귀족의 몰락을 다루고 있지만, 한때 찬란하게 빛나던 것들도 결국은 지는 벚꽃처럼 스러지고 사라져간다는 보다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까지 은유하는 명작이다. 

 

사이먼 스톤은 이 원작의 이야기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했다. 한 때는 잘 나갔지만 가세가 기운 재벌가의 송도영(전도연)이 10년 전 아들을 사고로 잃고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온 상황에서 시작한다. 원작에서 류바가 그러했던 것처럼, 송도영 역시 무너져가는 집안의 현실을 부정하고, 그 집 운전기사의 아들 황두식(박해수)이 남의 손에 벚꽃동산이 넘어가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 애쓰다 결국 자신이 사게 되는 상황을 그렸다. 구체적인 현실 상황들은 조금 다르지만, 작품의 정조는 유사하다. 한때 잘 나가던 인물의 몰락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것이다. 

 

그래서 전도연이 연기한 송도영은 어딘가 배우의 경험이 투영된 인물처럼 보인다. 연기자로서 해보지 않은 영역이 없을 정도로 많은 장르들을 섭렵했고, 또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칸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최고의 위치까지 올랐던 전도연이 아닌가. 최고의 위치란 결국 더 오르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내려와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실제로 전도연은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가 됐고, 임상수 감독의 ‘하녀’로 인기의 정점을 찍었지만 그 후 꽤 많은 작품들을 했음에도 생각만큼 대중적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영화 ‘카운트다운’, ‘집으로 가는 길’, ‘무뢰한’, ‘협녀, 칼의 기억’, ‘남과 여’, ‘생일’ 등등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영화배우로 워낙 빛나는 성취들을 보였기 때문에 영화만 고집해온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전도연은 1992년 ‘TV손자병법’과 ‘우리들의 천국’ 같은 드라마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 후로도 ‘젊은이의 양지’나 ‘별은 내 가슴에’ 같은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영화 ‘접속’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그 후에 ‘약속’, ‘내 마음의 풍금’, ‘해피엔드’ 같은 일련의 작품들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영화에 더 집중해왔다. ‘프라하의 연인’ 같은 드라마가 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그 후 한동안 드라마에서 얼굴을 보기 어려웠던 전도연이 다시 TV에 등장한 건 2016년 ‘굿와이프’에서부터였다. 즉 영화로 최고점을 찍은 후, 한동안 주춤했던 전도연의 행보는 최근 들어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영화, 드라마, 연극까지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을 통해 글로벌 존재감을 드러냈고, ‘인간실격’에 이은 ‘일타스캔들’로 안방극장에서도 건재함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제 ‘벚꽃동산’으로 1997년 ‘리타 길들이기’ 출연 이후 27년만에 연극무대로도 영역을 넓힌 것이다. 

 

최근에 전도연이 했던 작품들의 연기를 들여다 보면 이제 엄마 역할을 받아들이면서 다채로운 면들을 끌어내는데 있어 훨씬 자연스러워진 성숙함이 느껴진다. ‘길복순’에서는 킬러이면서 살인자들보다 더 무서운 딸 양육을 해야 하는 엄마 역할을 화려한 액션과 섬세한 심리연기로 선보였고, ‘일타스캔들’에서는 딸의 공부를 챙기다 알게된 일타강사와 사랑에 빠지는 반찬가게 사장 역할로 모성애와 러블리한 연인의 면면을 넘나드는 연기를 보여줬다. 물론 ‘벚꽃동산’에서도 딸과 위치가 뒤바뀐 것 같은 현실감각이 별로 없는 엄마 역할을 소화했지만 그 연기의 결은 훨씬 더 다채롭다. 이야기는 비극이지만 그 과정은 빵빵 터지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희극인 이 작품에서 전도연은 그 희비극을 넘나든다. 마치 다양한 경험치들이 모여 생겨난 경륜때문일까. 다가오는 비극을 알면서도 그걸 부정하다 결국 받아들이는 우리네 삶의 비의까지 전도연은 연기에 담았다. 

 

“전도연 연기 잘한다는 건 다 아는 거니, 제가 연기 잘하는 거 뽐내려고 하진 않아요. 어릴 때는 상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었지만, 이젠 내가 이 작품을 받아들인 만큼 관객이 받아들이도록 표현하는지가 중요해요. 연기를 뽐내려면 무대를 선택하진 않았겠죠. 무대는 실수를 가려주지 않으니까요. 오직 절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한 매체에서 한 인터뷰를 통해 전도연은 ‘벚꽃동산’이라는 연극에 참여하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드러낸 바 있다. 실로 연기력에 있어서 그는 세계 무대에서는 물론이고 국내 각종 시상식에서도 여러 차례 인정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인정 욕구가 아니라 전도연은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말한다. ‘벚꽃동산’이라는 작품 자체가 한 인물이 끌고 가는 게 아닌 다양한 인물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며 앙상블을 이루는 작품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전도연의 이 말이 가진 숨은 의미가 드러난다. 그는 말 그대로 자신을 애써 드러내기보다는 작품 속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도드라지지 않지만 전체적인 연기 앙상블이 좋은 작품에 일조한다. 흔히들 ‘미친 존재감’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건 본래 주변 인물 역할이지만 너무나 충실하게 그 역할을 연기해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의미다. 전도연이 보여주듯 진짜 미친 존재감은 전면에 나선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함께 하는 이들 속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할 때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지. (글:국방일보, 사진: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