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가게’로 또다시 간호사로 돌아온 박보영
“저도 예전에 큰 사고를 당하고 의식불명을 겪었었거든요. 그 때 의사선생님이 저희 엄마한테도 같은 말씀을 하셨었대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 엄마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속상하셨대요. 방법이 없구나 싶으셨대요. 하지만 전 다시 살았어요. 저도 제가 어떻게 의식을 되찾았는지 모르겠어요. 저희 엄마는 그저 매일매일 기도했대요. 저한테 의지를 불어넣고 싶으셨대요. 그래서 생각해요. 어쩌면 나 혼자만의 의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디즈니+ ‘조명가게’에서 영지(박보영)는 의식이 없는 환자 때문에 절망하는 부모에게 그 아픔을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녀 역시 사고로 의식 불명이 되었었지만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의식을 되찾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매일매일 기도했던 엄마 같은 이들의 의지들이 보태져 생겨난 기적같은 일이었을 거라며 절망하는 환자의 부모를 토닥인다.
이 장면은 강풀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조명가게’라는 독특한 작품의 메시지이자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의식을 잃고 어둠만 가득한 무의식의 골목길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낯선 곳은 마치 귀신들이 출몰하는 곳처럼 그려지지만, 드라마는 그 곳이 바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의 무의식 속이었다는 걸 드러낸다. 그런데 그 무의식은 실제 현실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이들이 누워 있는 중환자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는 환자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무의식 속 빛 하나 없는 무서운 골목길을 통과할 때 들려오는 노래가 된다. 어둠만 가득한 무의식의 골목길에 환한 빛을 비추는 조명가게. 그건 강풀 작가가 사고로 중환자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이나 희망의 메시지다. 환자의 의지는 물론이고 환자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깨어나기를 애타게 기도하는 그 마음들이 또 다른 의지가 되어 조명가게처럼 환자들에게 빛이 되어줄 것이고, 그것이 그들을 깨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간호사 영지는 사실상 조명가게 그 자체나 마찬가지 같은 존재다. 어두운 터널 속에 갇힌 환자와 가족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따뜻한 빛을 전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박보영이 바로 그 영지 역할을 맡은 게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악역이든 심지어 19금 역할이든 뭘 해도 ‘뽀블리(박보영+러블리)’라 불리는 배우가 아닌가. 박보영은 영화 ‘과속스캔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늑대소년’이나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등 주로 러블리한 멜로의 주인공 역할로 대중들의 머릿 속에 각인된 배우다. 하지만 그것은 박보영이라는 배우가 가진 밝은 에너지 때문에 생겨난 착시현상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늑대소년’은 우연히 시골에서 만나게 된 늑대소년과의 독특한 판타지 멜로였고, ‘오 나의 귀신님’ 역시 19금 귀신이 빙의된 인물로 1인2역을 해야하는 작품이었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어떤가. 국내드라마에서는 거의 처음 시도됐던 여성 슈퍼히어로물이었다. ‘어느 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제목처럼 멸망(서인국)이라는 판타지적 존재와 엮어지는 멜로를 연기했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에서의 생존기를 담은 재난물의 주인공이었다.
오히려 이처럼 다채로운 장르와 독특한 설정의 작품들을 연기하면서도 여전히 ‘뽀블리’로 기억되는 그 지점이 놀랍게 여겨지는데, 이게 가능해진 건 어떤 역할을 해도 타인을 흉내내는 게 아닌 바로 자신으로 그 역할을 소화해내는 이 배우의 특별함 때문이다. 예를 들어 ‘ 오 나의 귀신님’에서 그녀가 맡은 나봉선이라는 캐릭터는 음탕한 처녀 귀신이 빙의되면서 셰프인 강선우(조정석)에게 도발적으로 다가가는 인물인데, 어찌 보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박보영이 연기하면서 그런 도발적인 모습조차 귀엽게 여겼졌고 그래서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반응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 박보영이 최근에는 ‘위로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공교롭게도 전작이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도 박보영이 맡은 정다은이라는 인물은 정신병동의 간호사였다.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그 아픔까지 들여다보려는 이 간호사는 자신 또한 우울증에 걸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데, 그 과정을 통해 보다 환자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대인들이 가진 정신적인 불안감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인물인 것이다. 박보영은 이 작품을 통해 그저 귀여운 이미지만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깊이를 보여주는 배우라는 걸 증명해냈다. ‘조명가게’에서도 마찬가지다. 박보영이 연기하는 영지는 자신 또한 똑같이 사고와 의식불명을 겪었던 그 경험을 통해 다른 환자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고, 그들이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조명처럼 밝은 빛으로 빠져나오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일까. 현대인들은 이른바 ‘위험사회’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한다. 갖가지 사고와 사건의 위험은 물론이고, 매일 같이 누적되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위험도 커져만 간다. 그래서 박보영이 연달아 간호사 역할로 보여주는 그 따뜻하고 밝은 이미지는 우리에게는 이 어두운 세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밝은 조명 같은 위로로 자리한다. 이것이 박보영이라는 페르소나가 우리의 마음을 그 존재 자체로 따뜻하게 해주는 이유다. (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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